“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지난번 대전(태평양전쟁)에서 본의아니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전몰자의 희생 위에 서 있다. (그들은) 가족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리면서 조국을 위해 산화했다.… 이제부터라도 두번다시 그런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 말을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서 맹세하듯 토했다. 그가 그말을 예컨대 한국 제암리나, 명성황후 시해현장 또는 동학 농민전쟁 격전지 황토현, 그리고 중국 난징, 상하이, 만주, 동남아 등 군대위안부를 비롯한 수백만명이 강제동원 당하고 2천만명 이상이 일제에 의해 무고 무참하게 떼죽음을 당한 역사의 현장에 가서 무릎을 꿇고 했다면. 그랬다면 일본은 어떨지 몰라도 아시아를 온통 답답하고 우울하게 만든 야스쿠니의 맹세는 거꾸로 수백년 서세동점에 찌든 아시아를 희망과 환호로 들끓게 했을 것이다. 이른바 `아시아 르네상스'를 기약하는 약속의 말로 들렸을 것이다. 야스쿠니에서 꼭같은 말을 하더라도 일제침략의 상흔으로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그들 현장을 먼저 찾아 사죄한 뒤 그랬다면 “부전의 맹세” “전몰자에 대한 경의와 감사” “중국 한국 두나라 정상, 여러분들과 의견교환을 하고 오해를 풀고 싶다”고 한 그의 말은 최소한의 진정성은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다. 일본역사상 전무후무한 압도적 지지율을 바탕삼아 그 에너지를 뒤틀린 과거와 단절하고 일본과 아시아를 새로운 방향으로 설계하자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그는 패전국, 전범국 일본이 아닌 당당한 보통국가, 아시아를 주도하는 신뢰받고 자신감에 찬 일본으로의 재생이라는 자신의 꿈을 스스로 걷어차버렸다.
다만 한가지, 결과적으로 또다시 반면교사로서 충실했던 그의 역할은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항상 잊을만하면 불현듯 다시 나타나 아픈 과거를 되살리며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아시아를 일깨워온 일제 망령의 초혼자, 주술사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모름지기 감사해야 할 일이다.
전직 국방관리로 현 일본진로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조지프 나이 미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장조차 야스쿠니 참배는 “일본의 소프트 파워를 약화시키는” 독이 된다고 경고(<아사히신문> 12일)했다.
야스쿠니에 연연하는 세력들은 이 자명한 이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과거를 눌러 죽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고개를 치켜드는 과거, 분칠을 하면 할수록 초라한 속알맹이가 더욱 드러나 일본을 죽이는 이 역설과 이율배반을.
한승동 국제부 차장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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