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침묵과 망각의 죄
[사설/칼럼, 주요뉴스] 2000.12.19 (화) 19:03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본군 성(性)노예전범 국제법정' 이 열렸다. 필자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 남측 조사단' 일원으로 참석했다.
*** 일본군 性범죄 단죄
이 국제법정은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한 이래 1930년대부터 아시아.태평양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군인들의 성적(性的)욕구 처리를 위해 군(軍)위안소를 설치하고 한국여성들과 현지의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혹사시키고 학살한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일본 천황을 포함한 개인들의 형사책임과 일본정부의 국가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 국제법정은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60~7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국가와 국제사회 차원에서 아무런 정의도 실현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민간과 여성의 힘으로 일본군의 범죄를 고발하고 단죄하기 위해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피해여성들이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로서 침묵하지 않고 정의실현의 주체로서 새로운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 법정에서 피해여성들이 속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9개국의 피해단체, 지원.연대단체들은 2년이 넘는 준비작업 끝에 각종 증언과 문서 증거로 엄격한 절차 아래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국제법적 책임을 따져 물었다.
남북한은 이 과정에서 공동기소장을 작성하고 법정 진행도 함께 하며 일제의 과거를 청산하려는 노력을 같이 했다.
이 국제법정은 마침내 일본천황과 일본정부가 아시아.태평양의 여성들에 대해 국제법상 인도(人道)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가해국 일본 정부의 오만한 참가거부와 우익단체들의 시위,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 열린 이 법정은 가지게 된 의미만큼이나 많은 과제를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 20만명이 넘는 피해자를 낳은 엄청난 범죄행위에 대한 생존 피해여성들의 절규에 찬 고발과 세계 양심의 호소에 대해 우리 사회와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이다.
일본을 규탄하고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인가? 과연 우리는 이 문제의 해결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범죄자들을 가려내 처벌하기는커녕 도리어 국가이익을 내세워 다시금 침묵케 하고 배상은 개인차원의 문제이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한번쯤 이 여성들에게 가해진, 모두가 분노하는 행위와 이들의 삶에 대해 멈춰서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전후(戰後)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드러나고 해결 또는 책임회피를 위한 과정을 살펴보면 이 문제는 결국 일본군의 범죄행위에 대한 고발일 뿐 아니라 피해여성들이 돌아와 살게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고발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일본군 위안소 체제와 그 속에서의 범죄행위에 대하여는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당시 조선은 물론 연합국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냉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동 국제군사재판소는 이를 무시했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나 한.일 청구권협정 등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거듭되고 있는 전시(戰時)성폭력을 보면서도 역사 없는 망각의 미래로 우리는 이끌린다.
*** 몰라라 해온 우리에 일침
몇년에 걸친 수십만명의 피해여성을 대변해서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절제되고 단아한 증언을 한 우리의 '할머니' 들이 우리에게 남겨주고 싶어하는 소망은 참혹한 국가의 범죄에 대해 침묵의 강요라는 또 다른 범죄행위에 맞서 누구나 아니라고 당당히 나설 수 있고, 부서진 인간성을 주워담을 수 있는 국가와 사회라고 믿는다.
범죄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침묵함으로써 방조자와 공모자가 되지 않을 의무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에게 광복과 해방은 이들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당했으며 어떻게 사는지를 기억하고, 이들에게 정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국가일 것이다.
조시현 <성신여대 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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