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이맘때 한 일본인에 대한 조사를 쓴 적이 있다. 우리 언론 풍토에서 이승을 떠난 일본인을 평가하는 글을 싣는다는 것은 낯선 일이다. 조문 대상이었던 인물은 일본의 대표적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에서 사장을 지낸 야스에 료스케다. 야스에는 일본 지성계에서 ‘황제’로 불릴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 나라의 공안기관에서는 ‘반한·친북인사’로 낙인찍혔던 인물이다.
오늘은 또 한 일본인을 추모하려고 한다. 군대 위안부 문제, 여성 문제, 아시아 시민운동에 관한 기사를 관심있게 읽어본 독자라면 이름을 기억할 마쓰이 야요리라는 사람이다. 지난달 27일 간암이 악화돼 68살로 삶을 마감한 그는 지난 30여년 아시아 여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그가 관여했던 운동이나 행사는 일일이 들추기 어려울 정도다. 아사히신문사에 장기간 재직하면서 ‘마녀기자’로 필봉을 휘두르고 ‘아시아여성자료센터’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네트워크’ 등의 단체를 세워 비인간적 개발·환경파괴 정책에 반대하고 평화운동을 벌였다.
그의 주도로 이뤄진 사업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것은 역시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 법정일 것이다. 그는 군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각국의 시민단체 등과 협력해 옛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등 전쟁범죄를 기소해 ‘천황’과 일본 정부의 유죄판결을 이끌어 냈다. 일본에서 일왕을 전범으로 심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뒷받침돼야 한다. 극우단체 행동대원들이 휘두르는 총에 맞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일관된 삶은 아마도 항상 소수자 집단에 속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모는 모두 일본에서는 소수 종파인 개신교의 목사다. 태평양전쟁 말기 중국으로 끌려갔던 그의 아버지는 일본군의 만행을 직접 목격했다. 종전 뒤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군대가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들려주며 중국인들에게 속죄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말하곤 했다. 고교 시절 결핵으로 4년을 휴학했던 그가 대학을 거쳐 <아사히신문>에 들어간 것은 특별히 기자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여성 응시에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집국의 유일한 여성기자로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그는 남자 기자들이 선망하던 워싱턴이나 파리를 피해서, 출세 가능성이 없다는 아시아 지역의 특파원을 지망한다. 싱가포르에 자리를 잡은 그는 폴 포트 정권의 만행을 취재하는 한편으로 동남아시아의 매매춘, 여성빈곤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첫 여성 특파원으로서 국제문제 보도에 여성의 시각을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빈약한 탓인지 송고를 해도 지면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 적지 않았으나, 너무나 기막힌 사연들이라 울면서 기사를 계속 썼다고 한다.
94년 아사히신문사에서 정년 퇴직한 뒤 엔지오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친 그는 지난해 10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으로 몸의 이상증세를 느꼈다고 한다. 일본에 돌아와 불치 간암 선고를 받은 직후 각국의 시민운동 관계자들에게 보낸 전자우편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의 담담함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는 적어도 10년은 더 살기를 원했는데 느닷없이 자연재해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곧 평형을 되찾아 나의 치열했던 68년 생애에 조금 일찍 휴식을 주시려는 신의 섭리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또 폭력과 전쟁으로 채워진 20세기를 산 사람으로서 평화로운 비폭력 21세기를 위한 투쟁에 더 함께 있을 수 없어 유감이지만, 여러분이 투쟁을 계속해 평화를 이룰 것으로 확신한다고 격려했다.
오로라 하바테 디오스 여성거래 반대동맹 사무총장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단지 일본의 활동가로서만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중심이 돼 그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를 기억하는 한국인이 많아질수록, 그와 같은 일본인이 늘어날수록 한-일 관계의 미래는 밝게 열릴 것이다.
김효순 논설위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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