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안부 침묵 세상에 분노 끈질기게 실체 벗겨 공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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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section-005100032/2002/05/005100032200205131832019.html
`정신대’에 끌려갈 뻔한 기억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1943년, 그러니까 윤정옥이 17살 때의 일이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확대하며 병력 동원, 노동력 동원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처녀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여자들을 전쟁터에 끌고 갔다. 윤정옥은 당시 이화여전 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내주는 종이에 영문도 모른 채 손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게 `정신대’로 끌고 가는 종이라 생각한 윤정옥은 더럭 겁이 나 당장 학교를 그만 뒀다.
해방이 되고, 전쟁에 끌려갔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 학도병들, 징병 갔던 사람, 강제연행 당했던 사람…. 그러나 그 중에 여자는 없었다. 자신의 나이 또래 여자들이 그렇게 많이 끌려갔는데, 이들이 돌아왔다는 소리는 없었다. 궁금증이 커가던 무렵, “여자들이 줄 서 있는 남자들한테 하루 종일 당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집단학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신도 당했을지 모를 일에 충격을 받으며 윤정옥은 이 일이 어서 밝혀지길 기다렸다. 생각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 이 문제를 파헤쳐서 세상에 발표를 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윤정옥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되고 유학을 다녀 올 때까지 세상은 `사라진 여자들’에 대해 무심했다. 식민지 여성들이 겪은 일을 묻어 버린 한국사회에 분노하던 윤정옥은 1970년대에 들어와 `군대위안부’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증거가 없으면 소설이라도 써서 세상에 알릴 셈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역시 군대위안부 조사차 일본에 들른 윤정옥은 첫 일본군 위안부 출신 생존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에 대한 첫 인상은 지나친 깨끗함이었다. 배봉기는 대인기피증이 있고 만성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윤정옥이 방문을 하자 찻물을 올린다고 손부터 씻었다고 한다. 찻물을 올린 후 다시 손 씻고, 중간에 물이 끓었나 보면서 손 씻고, 오면서 손 씻고, 찻잔 가지러 가면서 손 씻고, 갖다 놓고 가서 또 손 씻고…. 윤정옥이 속으로 세니 전부 6번이었다. 군대위안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못했지만, 윤정옥은 배봉기가 군대위안부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현재의 삶에도 고통스럽게 각인되어 있음을 아프게 공감할 수 있었다.
배봉기와의 만남으로 윤정옥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피해자 실태조사를 위한 일본답사를 다녔고, 강연을 통해 그 실상을 알렸으며, 신문지면을 빌어 이 문제를 세상에 알려 나갔다. 군대위안부 문제는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 문제에 공감한 여성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일본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데 이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해, 군대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다가 다음해 국내 생존자 김학순의 증언으로 군대위안부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자리매김한다. 군대위안부의 강제동원이 있은지 50여년, 전쟁하 여성의 기억을 공유하며 끈질기게 `사라진 여성들’을 찾아다닌 한 여성의 노력에서 시작된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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